
간찰지(簡札紙) 전체 길이가 10여 미터에 이르는 두루마리이지만, 색지 한 장의 길이는 40센티미터 내외로 편지나 시를 쓸 때 뜯어 쓴다.(19세기) 종이 공예는 민간에서 발달한 실내 문화이다. 한지로 일상생활의 소도구를 만들거나 사용하면서 형성된 종이 공예는 가정용 소품 공예였다. 종이 한 장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겨 되풀이 사용하던 선조의 생활 정신과 검소한 마음을 담고 있다.
종이 공예품은 각종 상자를 비롯하여 지도, 종이꽃, 지승 용기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한지를 꼬아 만든 지승 공예는 그 형태와 용도가 다채롭다.
중국 후한 말인 105년에 채윤이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고,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삼국 시대였다. 통일신라 시대의 불경책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 그 시대의 종이 질이 상당히 좋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종이는 아주 두껍고 닥나무의 섬유질 외에도 비단 섬유를 재료로 사용하였다. 비단 섬유는 종이를 강하게 하기 위해 섞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에서는 한지를 조선지 또는 고려지라 불렀는데, 기록에는 대개 고려지로 표기되어 있다. 고려지 중에서도 특히 옥색 취지, 비단 종이, 도련이 매끄러운 백수지 등이 높이 평가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구하기 어려웠는데, 질 좋은 한지는 대부분 중국으로 수출하여 귀했던 탓이다. 그래서 종이를 함부로 낭비하지 말도록 했고, 버드나무나 마 줄기를 섞어서 만든 잡추지 같은 허술한 것을 사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닥나무가 한지 원료로 사용된 것은 우리나라에 종이가 처음 전해졌을 때부터로 보인다. 처음에는 뽕나무 껍질 같은 것도 같이 사용된 듯하나 흐물거려 닥나무가 종이 원료로 쓰였다. 닥나무는 호남 지방에 먼저 전해져 그곳에서 많은 양이 재배되었다. 한지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주 한지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지 제작 과정의 첫단계는 닥나무를 잿물에 넣어 삶아 나무껍질을 벗겨 내는데 표피를 떼 내고 안쪽 껍질만 바로 떼어 잿물을 걸러 낸다. 이 공정은 잿물을 사용하므로 물이 좋아야만 양질의 종이를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한지를 뜨는 곳은 주로 물이 좋은 강가에 있었다. 그다음 잘 삶아진 닥나무 껍질을 반죽하여 절구통에 넣고 방망이로 찧어서 섬유질을 길게 늘인다.
그다음은 물뜸 작업이다. 나무로 만든 치통에 물을 넣고 충분히 두드려서 넓게 펼친 닥나무 껍질을 여과시킨 다음 거기에 닥나무 액을 넣고 흔들어 섞는다. 이때 닥나무 액은 풀과 같은 작용을 한다. 종이를 뜬 발을 치통 위에 올려놓고 쌀을 일듯 흔들어 얇게 종이를 펼친다. 이렇게 펼쳐진 종이를 습지판에 놓고 일단 물기를 뺀 다음 가느다란 방망이로 한 장씩 얇게 말아 통풍이 잘 되는 곳에 걸어 놓고 말린다. 바싹 마른 종이는 다림질하듯 늘여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완성시킨다. 색지를 만들려면 물뜸 작업을 할 때 치통에 천연 염료를 풀어 염색한다.
종이 공예 중 한지의 특징을 가장 잘 살린 것으로 반짇고리와 색실첩이 있다. 색실첩은 상자 뚜껑 부분에 접으면 평면으로 펼쳐지고 열면 상자같이 입체 모양이 되는 작은 구획이 많이 있다. 여기에 각양각색의 실패가 들어간다. 이 뚜껑의 밑부분에는 작은 서랍이 서너 개 있다. 반짇고리 몸체도 몇 개로 나누어져 바느질 도구를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왼쪽) 자수 색실을 넣어 두는 실첩 - 수십 칸으로 나뉘어 있으며, 큰 칸마다 당채로 길상문과 태극문 등을 표현했다.(19세기) (오른쪽) 반짇고리 - 색지로 길상 문양을 오려 붙여 장식했는데 대나무로 만들어서 가볍다.(19세기) 우리 자수 박물관을 찾는 이나 전시회 때 많은 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작품을 감상해야 하느냐고 묻곤 하는데, 작품 배경에 깔린 수복 사상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답한다. 수복은 장수와 행복을 뜻한다. 우리 것의 문양이나 색상 및 형태는 한결같이 장수나 복락을 상징한다. 작은 종이 공예 소품에도 이러한 수복강녕을 상징하는 문양이 대부분이다. 색실첩과 반짇고리 등을 보면 나비나 박쥐 및 갖가지 길상 문양이 색지로 장식되어 있다. 색 배합은 좌우 대칭이나 대각선을 중심으로 한 사방 대칭형으로 주로 배치한다. 
종이로 만든 고비 상하단에는 청룡과 호랑이 문양을, 중앙에는 봉황문을 당채로 그려 넣었다.(18~19세기) 빗접에는 빗, 머리를 장식하는 비녀 및 화장품을 넣어 둔다. 빗접 중에는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장식용으로 벽에 걸어 둘 수 있게 고리가 달리고 문양이 아름다운 것도 있다. 또 두꺼운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발라 상자를 만들고 색지로 문양을 오려 붙인 것도 있고, 나무로 형태를 만들어 색지로 장식한 것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종이 공예품은 다양하다. 지통, 갓통, 화관이나 족두리, 조바위를 보관하는 통이 있는데, 여기에는 겉에 기름을 발랐다. 이 밖에도 서안(書案), 연상(硯床), 고비(종이로 만들어 벽에 걸어 두고 편지 등을 꽂아 두게 한 물건), 장롱, 패물함, 3합 상자, 간찰지 등 일상생활에 흔히 사용된 것이 많다.
지승(紙繩)이라 하여 종이로 꼬아 만든 새끼줄이 있는데, 주로 노인이 한가한 시간에 옛 책을 한 자 넓이로 길게 찢어 새끼를 꼬듯 비스듬히 말아 끈을 만들었다. 지승 공예는 조선 후기에 발달해 여러 모양의 형태가 만들어졌는데, 방석 종류를 제외하고는 주로 둥근 용기가 많다. 지승 용기로는 곡식을 넣어 두는 함지박, 망태, 화병, 고비, 뚜껑이 있는 그릇, 호리병, 옷상자, 항아리 등이 있다. 문양을 넣어 옻칠을 한 것도 있고, 뚜껑이 있는 호리병에는 씨앗 등을 넣어 보관했다. 옻칠을 한 지승은 물이 묻어도 젖지 않아 세숫대야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가볍고 소리가 나지 않아 혼례용 가마 안에서 쓰는 요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승으로 만든 물건은 제기, 기러기, 짚신, 필통, 베개 등 다양하다. 주로 못 쓰게 된 옛 책으로 지승을 만들었는데, 옛 선비의 집에서는 혼인할 때 패물함을 묶는 데도 사용했다.
안동 지방의 종이 삿갓은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삿갓 골격에 종이를 바르고 칠하여 장식한 다음 기름을 먹여 만들었다. 또 밤길을 갈 때 앞을 밝혀 주는 초롱은 얇은 천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빛을 잘 투과시키는 한지로 많이 만들었다. 무당이 사용한 종이꽃에는 작약이나 연꽃, 모란, 국화 등이 있었고, 종이꽃은 궁중 잔치나 집안의 경조사, 불교의 꽃 공양에도 사용되었다.
종이 공예가 이렇듯 다양하게 발달한 이유는 가지고 다니기 편하고 폐품을 재활용하여 쉽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질기고 부드러운 한지의 질감과 색상이 우리 민족의 심성과 어우러져 여인의 손을 통해 우수한 전통 공예품으로 뿌리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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